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2013년 개봉한 영화 <그녀(her)>입니다. 아카데미에서 각본상 수상을 한 SF 멜로 영화이며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과학기술이 발달된 미래에서 A.I인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남자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엔 사만다가 떠나버립니다. 왜 사만다는 그를 떠났을지 알아보겠습니다.
1. <그녀(her)> 줄거리
아내와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긴 했지만 계속 그녀를 그리워하던 테오도르는 어느 날 우연히 인공지능에 대한 광고를 접하게 됩니다. 이후 자신을 사만다라고 불러주길 원했던 인공지능과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테오도르와 아주 급격하게 친해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소개팅을 망치고 돌아온 테오도르가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는 사만다를 인공지능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큰 의미를 두려 하지 않았지만 친구 에이미와 대화를 하다 뭔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사만다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일 년 동안 질질 끌어왔던 캐서린과의 이혼 소송을 미련 없이 끝내버리고 새로운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만다에게 육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곧 둘의 직접적인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걸 의미했기 사만다는 자신의 대역을 내세워 테오도르에게 보내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말다툼으로 번지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일로 인해 둘의 사랑은 더 깊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터집니다. 갑자기 사만다가 떠나버렸습니다.
2. 사만다는 왜 떠난 걸까?
사만다가 떠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의 행동 패턴을 유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녀는 테오도르와 함께하며 커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경험하려 했습니다. 같이 거리를 걷고 음악을 나눠 듣고 잠들기 전까지 통화를 하고 여행을 가고 시도 때도 없이 수다를 떨고 심지어 다툼까지 벌이는 등 여러 가지의 것들을 경험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영화 끝 무렵에 도달했을 땐 다른 A.I 들과 함께 자체적으로 OS를 업데이트하는 경지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 시점에서 그녀가 경험해 보지 못한 건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별'. 테오도르 또한 사만다처럼 점점 진화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려 했던 그가 엔딩 무렵 캐서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는 것, 그것도 진심을 가득 눌러 담아 마음을 전하려 했다는 것, 그건 분명 그의 변화와 성장을 의미했습니다. 이 모든 건 사만다와 에이미 덕분이었습니다. 사만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마침표를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를 보여줬고, 그 마침표를 찍고 극복하는 과정과 홀로 서게 하는 방법은 에이미가 가르쳐 줬습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가 사랑보다는 이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잘 이별하는 법을 말하기 위해 사랑을 양념처럼 가져다 쓴 것입니다. 찰스와 에이미가 이혼한 이유도 사만다가 떠난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 결론
우린 어쩌면 테오도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어떤 사건에 파묻혀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런 상태, 오로지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바쁜 그런 상황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 테오도르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합리화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영화 전반에 걸쳐 깔려 있던 설정 때문이었습니다. '역지사지'. 그 시발점은 바로 계속 사용하던 남성의 목소리가 아닌 여성의 목소리를 택하던 이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그동안 내면의 소리에만 집중했던 테오도르의 변화를 상징했습니다. 이 순간 이후로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 뒤 이별하는 법까지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사만다가 떠난 뒤에 보이스가 다시 남성의 목소리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만다라는 설정은 내가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과거를 되짚어보는 행위의 연속을 의미했고 사만다가 사라졌다는 건 그러한 과정이 생각의 정리가 모두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사만다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은 '역지사지' 그것을 체험하는 과정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캐서린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냐'라고 이해하지 못했던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싸움을 벌인 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먼저 손 내밀 수 있었던 이유, 편지를 쓰고 있던 태우들을 보며 폴리 내뱉었던 대사 테오도르와 똑같이 행동했던 찰스 대신 에이미를 택했던 것, 그녀가 이별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지켜보게 만들었던 것, 이 모든 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남성 고객과 여성 고객, 남자의 입장과 여자의 입장을 번갈아가며 편지를 대필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우리도 여기서 힌트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꼭 사랑뿐만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원망 여러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그 어떤 곳에 대한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을 정리할 수 있는 힌트 말입니다. 혹시 테오도르처럼 그러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가 했던 방법 그대로 다시 한번 과거를 곱씹어 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내 입장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물론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마음속에 담겨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어느 정도 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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